AI는 대중의 욕망을 읽을 수 있을까
AI는 대중의 욕망을 읽을 수 있을까

AI가 읽는 것은 대중의 욕망이 아니라, 대중이 남긴 반응과 행동의 흔적입니다.
최근 나홍진 감독의 <호프>를 보고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어떤 감독은 관객이 원하는 것을 알면서도 주지 않을까요?
감독에게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영화가 있습니다. 관객에게는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가 있습니다. 두 욕망이 만나면 좋은 영화가 되지만, 한쪽으로 기울면 작품은 감독의 독백이 되거나 관객의 기호만 좇는 상품이 됩니다.
저에게 <파묘>는 이 균형을 꽤 잘 맞춘 영화였습니다. 감독이 만들고 싶은 세계가 분명했지만, 관객이 기대하는 장르적 쾌감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반면 어떤 영화는 감독의 욕망이 너무 앞서면서 관객이 들어갈 자리가 좁아집니다.

그러다 장항준 감독의 <왕과 사는 남자>를 떠올렸습니다.

대중적으로 사랑 받는 영화를 만든 감독은 때때로 가볍게 평가되고, 관객과 거리를 둔 작품을 만드는 감독은 쉽게 거장으로 불립니다. 그래서 묘한 역설이 생깁니다.
소위 B급 감독이 천만영화를 만들고, 거장들이 B급영화를 만드는 것처럼 보이는 순간입니다.
물론 영화의 가치를 관객 수 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흥행이 작품성을 보장하지도 않고, 흥행 실패가 곧 작품의 실패를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질문은 남습니다.
영화란 감독의 욕망일까요, 관객의 욕망일까요?
그리고 이 오래된 질문에 AI는 답을 줄 수 있을까요?
AI라면 대중이 원하는 것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콘텐츠 산업은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관객 데이터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제목을 검색했는지, 어떤 포스터를 눌렀는지, 몇 분 동안 봤는지, 어느 장면에서 멈췄는지, 끝까지 봤는지, 다시 봤는지, 친구에게 공유했는지, 다음 작품까지 결제했는지를 모두 알 수 있습니다.
댓글과 리뷰도 있습니다. AI는 수십 만 건의 반응을 읽고 감정을 분류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배우를 좋아하는지, 어떤 장면을 지루해 하는지, 어떤 소재에 반응하는지도 빠르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대중이 원하는 영화를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AI가 읽는 것은 대중의 욕망 그 자체가 아니라, 대중이 남긴 반응과 행동의 흔적이기 때문입니다.
댓글을 남기는 사람은 전체 관객이 아닙니다. 대체로 아주 만족했거나 아주 화가 난 사람이 더 적극적으로 말합니다. 별점과 리뷰만 분석하면 목소리가 큰 소수가 전체 관객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행동 데이터가 항상 진실인 것도 아닙니다. 클릭은 관심을 의미할 수 있지만 만족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오래 봤다는 사실도 몰입해서 본 것인지, 그냥 틀어둔 것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검색량이 늘었다고 실제 구매 의사가 늘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이 남긴 말은 욕망의 일부이고, 행동 데이터도 욕망의 일부입니다. 어느 하나가 욕망 전체는 아닙니다.
클릭을 욕망으로 착각하면 생기는 일

유튜브는 한때 클릭을 중요한 성공 지표로 봤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누른 영상이 좋은 영상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클릭을 최적화하자 자극적인 제목과 썸네일이 늘어났습니다. 클릭은 많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반드시 만족스러운 시청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유튜브는 클릭만이 아니라 시청 시간과 만족도 신호를 더 중요하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측정 지표를 바꾸자 플랫폼이 보여주는 콘텐츠도 바뀌었습니다.
이 사례가 중요한 이유는 AI가 틀려서가 아닙니다. AI는 주어진 목표를 오히려 너무 충실하게 수행했습니다. 문제는 사람이 클릭을 욕망이라고 정의한 데 있었습니다.
넷플릭스의 개인화 포스터도 비슷합니다. 같은 작품이라도 누구에게 어떤 이미지를 보여주느냐에 따라 선택률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AI는 어떤 관객이 어떤 이미지에 반응하는지 찾아내는 데 뛰어납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아닙니다.
AI가 알아낸 것은 “이 사람이 어떤 방식으로 제시된 작품을 클릭할 가능성이 높은가”이지, “이 사람이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사랑하게 될 것인가”가 아닙니다.
스포티파이의 개인화 추천에서도 흥미로운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추천을 정교하게 만들자 이용량은 늘었지만, 개인이 접하는 콘텐츠의 다양성은 오히려 줄어드는 현상이 관찰됐습니다.
AI는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을 더 잘 찾아줍니다. 동시에 내가 이미 좋아했던 것과 비슷한 세계 안에 나를 오래 머물게 할 수도 있습니다.
대중의 욕망을 잘 읽는 기술이, 대중의 욕망을 좁히는 기술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AI는 수요를 읽지만, 수요를 판정하지는 못합니다

소비자 반응을 분석하는 AI의 역할은 네 단계로 나눠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감정 분석입니다.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말하는지, 부정적으로 말하는지를 구분합니다.
두 번째는 고객 인사이트입니다. 왜 좋아하는지, 무엇을 불편해하는지, 반복해서 등장하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찾습니다.
세 번째는 수요 신호입니다. 검색, 클릭, 장바구니, 구매, 재방문, 이탈 같은 행동이 실제로 변했는지를 확인합니다.
네 번째는 의사결정입니다. 제품을 바꿀 것인지, 가격을 조정할 것인지, 작품에 투자할 것인지, 어떤 메시지로 시장에 내놓을 것인지를 결정합니다.
많은 기업이 첫 번째와 두 번째 단계를 하고도 네 번째 단계까지 왔다고 착각합니다.
고객 반응을 AI로 분석했습니다.”
“긍정 반응이 높습니다.”
“이 기능에 대한 언급이 많습니다.
하지만 언급량이 많다는 사실과 실제로 돈을 낼 의사가 있다는 것은 다릅니다. 긍정적인 반응과 구매, 재방문, 추천도 같은 것이 아닙니다.
AI는 수요를 읽는 데 강하지만, 수요를 판정하는 데는 약합니다.
판정에는 대표성 보정이 필요합니다. 실제 행동 데이터와 대조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능하면 A/B 테스트나 제한된 출시를 통해 인과관계를 확인해야 합니다.
고객의 말은 “왜”에 대한 후보를 줍니다.
고객의 행동은 “무엇이 일어났는가”를 보여줍니다.
AI는 둘을 빠르게 연결해 가설을 만듭니다.
하지만 최종 판단은 실험이 합니다.
가장 좋은 사례는 AI가 정답을 맞힌 사례가 아닙니다

이번 리서치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례 중 하나는 Etsy(엣시)였습니다.

(https://www.etsy.com 글로벌 수작업·핸드메이드 전문 쇼핑몰)
Etsy는 검색과 추천 순위를 개선하기 위해 AI 모델을 적용했지만, 처음부터 성공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초기 실험에서는 기대한 결과가 나오지 않았고, 이후 새로운 특징과 신호를 추가해 다시 온라인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AI가 한 번에 고객의 욕망을 맞혔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패한 결과를 숨기지 않고, 어떤 신호가 부족했는지 다시 살피고, 모델을 수정한 뒤 실제 사용자 행동으로 재검증했다는 점입니다.
AI가 잘한 일은 정답을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더 빠르게 가설을 세우고 검증하게 만든 것입니다.
고객지원 분야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보입니다. AI가 수많은 상담 내용을 읽고 반복되는 문제를 분류하면, 기업은 고객이 어디에서 막히는지 훨씬 빨리 볼 수 있습니다. 상담 문장을 추천하거나 반복 문의를 자동으로 처리해 대응 시간을 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상담 시간이 줄었다는 것과 고객의 문제가 해결됐다는 것은 다릅니다. 자동 응답률이 높아졌다는 것과 고객 경험이 좋아졌다는 것도 다릅니다.
AI 도입의 성과를 판단하려면 “얼마나 자동화했는가”가 아니라 “고객의 행동과 사업의 결과가 어떻게 달라졌는가”를 봐야 합니다.
영화에서 AI가 잘할 수 있는 일

그렇다면 영화에서 AI는 어디까지 들어오는 것이 좋을까요?
AI는 관객과 작품 사이의 약속을 점검하는 데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어떤 관객층이 이 소재에 반응하는지, 어떤 포스터와 예고편이 작품의 매력을 정확히 전달하는지, 관객이 어느 지점에서 기대와 다른 감정을 느끼는지, 어떤 장르적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말하는지를 찾아낼 수 있습니다.
배급 시기, 마케팅 메시지, 예고편 구성, 타깃 관객, 추천 방식처럼 이미 만들어진 작품을 누구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지 결정할 때도 유용합니다.
반면 AI가 잘하지 못하는 일이 있습니다.
왜 지금 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지, 아직 세상에 없는 세계를 어떤 방식으로 보여줄지, 관객이 익숙하지 않은 감정을 어떻게 끝까지 따라오게 만들지는 데이터만으로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데이터는 관객이 무엇을 거부하는지 알아내는 데는 강합니다. 하지만 관객이 아직 경험하지 못한 것을 왜 사랑하게 될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이 차이가 창작의 자리입니다.
AI는 이미 드러난 욕망을 증폭합니다.
창작자는 아직 이름 붙지 않은 욕망을 발견합니다.
장항준과 나홍진, 누가 더 좋은 감독일까요

사실 이 질문에는 답이 없습니다.
장항준 감독과 나홍진 감독은 관객을 대하는 방식도, 자신이 영화 안에 넣는 욕망의 크기도 다릅니다. 한쪽은 관객과의 약속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고, 다른 한쪽은 관객이 쉽게 들어오지 못하더라도 자신이 만든 세계를 끝까지 밀어붙일 수 있습니다.
둘 다 감독의 선택입니다.
다만 관객의 욕망을 이해하고 만족시키는 능력을 작품성보다 낮은 능력처럼 보는 시선에는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사람을 웃기고, 울리고, 두 시간 동안 이야기에 붙잡아두는 일은 결코 가벼운 기술이 아닙니다. 대중성을 얻었다는 이유로 감독의 성취를 낮게 평가하고,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운 작품이라는 이유로 더 높은 예술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도 이상합니다.
반대로 대중이 원한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성공한 공식을 반복하는 것도 창작이라고 부르기 어렵습니다.
관객을 무시하면 독백이 됩니다.
관객만 따라가면 복제가 됩니다.
좋은 영화는 그 둘 사이에서 긴장을 견디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파묘>가 흥미로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감독의 세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이 극장에서 기대하는 감정과 장르적 쾌감을 함께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AI는 이 균형을 대신 결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어느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은 될 수 있습니다.
이 문제는 영화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업도 매일 같은 실수를 합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묻겠다고 설문을 하고, 리뷰를 모으고, VOC를 분석합니다. 이제는 그 모든 자료를 AI에 넣어 한 번에 요약합니다.
그리고 요약된 문장을 고객의 욕망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고객이 말한 것, 고객이 실제로 한 것, 고객이 돈을 지불한 것은 서로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AI 기반 소비자 분석은 보고서를 만드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됩니다.
댓글에서 반복되는 불만을 찾았다면 실제 이탈과 연결되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특정 기능에 대한 요구가 많다면 그 요구를 한 사람이 전체 고객 중 얼마나 되는지 봐야 합니다. 긍정 반응이 높다면 구매와 재방문으로 이어지는지 검증해야 합니다.
AI가 만든 인사이트는 결론이 아니라 실험의 시작점이어야 합니다.
USLab AI가 AX를 바라보는 관점도 같습니다.
수천 건의 고객 반응을 AI로 요약하는 것 자체는 이제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요약이 어떤 의사결정을 바꾸고, 실제 업무와 제품에 어떻게 반영되며, 반영 이후의 결과를 어떻게 다시 학습할 것인가입니다.
AI 분석이 대시보드와 보고서에서 멈추면 그것은 더 빠른 보고일 뿐입니다.
AI 분석이 가설, 실험, 의사결정, 실행 결과로 이어질 때 비로소 기업의 학습 속도가 달라집니다.
AI가 읽지 못하는 욕망은 누가 만들까요

AI 시대에는 대중의 욕망을 과거보다 훨씬 빠르게 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AI가 읽는 것은 욕망이 지나간 자리입니다.
검색어, 클릭, 시청 시간, 구매, 이탈, 댓글은 모두 욕망의 흔적입니다. AI는 이 흔적을 누구보다 빠르게 모으고, 분류하고,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흔적은 언제나 과거에 생깁니다.
새로운 영화, 새로운 제품, 새로운 문화는 아직 데이터가 없는 곳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경험하기 전에는 그것을 원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때로는 창작자가 먼저 보여준 뒤에야 “내가 원했던 것이 이것이었구나”라고 깨닫습니다.
그래서 AI 시대에도 감독과 기획자와 창업자의 욕망이 필요합니다.
다만 자신의 욕망만 밀어붙여서는 안 됩니다. 대중이 남긴 신호를 읽고, 자신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확인하고, 필요한 것은 실험해야 합니다.
관객의 욕망을 무시해서도 안 되고, 관객의 욕망에 복종해서도 안 됩니다.
AI는 그 사이의 긴장을 없애는 기술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긴장을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기술입니다.
AI가 해야 할 일은 대중을 대신해 욕망을 선언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무엇에 반응했고, 어디에서 떠났으며, 어떤 선택을 반복했는지를 인간이 더 빨리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신호를 보고 무엇을 만들 것인지는 여전히 사람의 몫입니다.
AI는 이미 존재하는 욕망을 발견하는 데 강합니다.
하지만 아직 존재하지 않는 욕망을 세상에 꺼내는 일.
그것이 창작자의 일이고, 어쩌면 거장의 진짜 역할일지도 모르겠습니다.